메시아닉 쥬가 본 예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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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닉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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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11-07 18:3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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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기독교에서 메시아닉(messianic)이라는 용어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원래 메시아닉이란 메시아닉 유대교를 언급합니다. 메시아닉 유대교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일어난 종파로, 복음주의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메시아닉이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에 관련이 있는 것은 유대교에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는 토라 회복, 즉 모세오경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관심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한국 교회에서 메시아닉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한 편으로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닉에 대한 접근이 순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어떤 부류는 메시아닉과 관련한 것을 교회 성장의 방편이나 수단 정도로 삼으려고 합니다. 또한 어떤 부류는 메시아닉을 통해 이스라엘 선교를 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메시아닉에 접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왜 메시아닉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요? 우선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솝(Aesop) 우화 가운데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늑대가 길 가에서 양의 털을 발견합니다. 늑대는 양의 껍대기를 뒤집어 쓰고 양의 우리로 들어갑니다. 양들은 늑대가 양털을 뒤집어 쓴 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덕분에 늑대는 양들 틈에서 손쉽게 양들을 잡아 먹습니다.
  늑대는 점점 더 자신감이 생겼는지, 이번엔 목동이 자신을 알아 보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양들 틈에 섞여 목동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마침 목동이 자신에게 다가오지만 목동은 양의 털을 쓴 늑대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웃기던지 늑대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목동은 그 늑대를 잡아 도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정체를 숨긴 악당을 조심하라'는 교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솝이 의도한 교훈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남의 인생 살지 말고,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생긴 그대로, 남의 인생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스라엘서든 한국에서든 메시아닉이라고 하면 이상한 눈총을 받는다는 겁니다. 메시아닉 유대교는 유대교에서, 한국에서는 기독교도 유대교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입니다. 그런 눈총이 부담스려워 드러내놓고 메시아닉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행한 것은 일부 하나님 말씀을 온전하게 수호하려는 부류들이 용감하게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스라엘에는 메시아닉 쥬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5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비하면 폭발적인 증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 역시 메시아닉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메시아닉이란 기독교에는 없는 토라를 회복하자는 것이 중심입니다. 메시아닉 쥬들은 토라에 복음이 더해졌습니다. 반면 기독교인에게는 복음에 토라가 더해지는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토라를 회복하려는 것은 유대인이 되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토라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토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마5:17절).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토라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는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의 도덕적 윤리적 수준은 다른 종교나 일반인들보다 더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뭐가 문제인지 생각할 때 기독교인들에게 구원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는 간과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의 토라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그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려는 여호와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원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것과 함께 구원 얻은 자의 도리 내지는 실천 강령을 위해 토라 회복이 꼭 필요합니다. 토라 회복이 다른 목적으로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원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복음은 너무 자유분방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도 내가 과거 어떻게 살았든 오직 주님의 이름만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유병언의 구원파적인 신학 내지 신앙이 그런 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신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견인이라는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식의 명분 만들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토라 회복은 우리의 믿음을 좀 더 굳건하게 세우려는 의도입니다. 따라서 토라에 이미 열려 있거나, 관심을 갖으려는 모든 사람들이 좀 더 이해와 관용, 그리고 함부로 이단시 하지 않는 풍토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려는 시도가 곧 메시아닉에 관심을 갖는 목적입니다.  

  '유대교에는 복음을, 기독교에는 토라(율법)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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