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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해하기 창 12 : 1 – 17 : 27 / '레크 레카'(Lech Lecha) / 너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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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11-13 12:17 댓글0건

본문

▶ 너는 가라

 

토라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3대 인물 가운데 마지막 인물은 아브람이다. 아브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중요하다. 창11장 27-32절에는 데라의 족보를 다루면서 처음 아브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데라요, 데라는 세 아들, 즉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를 낳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하란이 롯을 낳았다는 것이다.

토라의 어법이 약간 낯설다. 왜냐하면 롯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 끼어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토라와 히브리어 문화를 이해하면 이는 곧 해결 할 수 있다. 데라의 세 아들 가운데 아들을 낳은 것은 아마도 하란 밖에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30절 사래가 임신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는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롯이 삼 대에 낄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요, 아브람과 나홀은 장가를 들었고, 아브람의 아내는 사래며, 나홀의 아내는 밀가라는 것이다. 반면 하란의 아내는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대신 하란의 자녀들만 언급하고 있다. 롯과 밀가, 그리고 이스가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데라가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그리고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다는 것이요, 하란에 이르러 거류하다가 거기서 데라의 나이 205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데라가 죽었지만 가나안 여정은 중단되지 않았다. 토라인 12:1절에는 그 여정이 아브람에게로 넘겨졌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땅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레크레카, 즉 ‘너는 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아브람에게 그의 아비 집을 떠날 것을 말씀 하셨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나안에는 대체 뭐가 있기에 큰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면 당시 우르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 갈대아 우르는 척박한 땅이었다. 따라서 농사를 짓기엔 역부족이었다. 척박한 땅이라고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환경 때문에 힘들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갈대아 우르는 항구 도시로, 항구의 특성을 살린 교역을 통해 농사를 짓는 것 보다 더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다. 각국 무역상들의 상거래와 함께 각국의 우상까지 들어와 우르는 우상이 넘치고 그에 따라 우상 숭배가 심했다. 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우상에 투영된 것이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 역시 우상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우르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상과 관련하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께서 왜 데라와 그의 아들 아브람에게만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 토라에서 언급했던 노아의 후손들, 특히 그의 족보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데라는 노아의 후손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게 복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두 번째 질문인 하나님께서 보여 줄 땅에 뭐가 있냐는 것이다. 실제로는 갈대아 우르가 가나안 보다 살기에 더 좋은 도시다. 그런 장소를 떠나라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곳을 떠날 것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고 한 것은 단지 경제적 논리로만 따질 것이 아니다.

1절에서 한글 성경에는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번역했다. 이 구절에 따르면 마치 동사가 두 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떠나’, ‘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떠나’는 동사가 아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우미베트’다. 영어로 하면 ‘from your father’s house(너의 아버지 집에서)‘다. 전치사 form이 마치 ’나온다‘는 동사처럼 해석된 것이다. 영어를 아는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안다. 전치사가 동사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려면 가장 먼저 그의 아비 집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어렵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는 세속의 경제적 논리로는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아브람의 결단과 용기가 대단하다. 그런데 이후 아브람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야기는 우리를 실망케 한다.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고 한 땅에 기근이 든 것이다. 10절에는 그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고 하셨던 땅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런데 그 땅에 기껏 기근이 들었다는 게 말이 안된다. 고대 사회에서 기근은 일종의 저주다. 복을 주셨다면 이전 보다 더 나은 환경이어야 할 텐데 그게 아니다. 내용의 논리상 모순이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애굽에서 아브람이 보여준 행동은 이전과 정반대다. 11-20절에는 그가 애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은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아내 사래는 그의 이복누이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아내라고 하지 못하고 누이라고 한 것은 비겁한 행동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브람에게서 왜 이런 모순이 일어난 것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에 대한 행동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17절에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라고 한다. 이는 마치 그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애굽의 바로에게서 갖가지 혜택을 얻게 하는 기회가 된다. 16절에는 바로가 아브람의 아내 사래 일종의 애굽의 바로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욕보인 보상금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부분은 서로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요, 억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말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땅에 있거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기근이 든 가나안도, 모든 것이 풍요로운 애굽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따라서 아브람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야말로 축복인 셈이다. 본문에서 아브람의 행동을 보면 그는 땅을 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따랐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하다.

▶ 아브람의 방랑

 

토라는 이후, 아브람의 여정을 계속 따라가고 있다. 그의 여정은 거의 방랑이나 다름없다. 13장-15장은 그의 여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이 단순한 방랑이 아닌 목적이 있음을 각 장에서는 밝히고 있다. 먼저 13장에는 아브람이 애굽에서 네게브로 올라가 벧엘로 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벧엘은 그가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이요,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는 토라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또한 아브람이 롯과 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 아브람이 선택한 것은 땅이 아니었다. 기꺼이 롯에게 우선권을 주고, 그가 그 땅을 선택하자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가나안 땅을 지켰다.

아브람이 땅 때문에 조카인 롯과 헤어졌다. 13:10절엔 롯이 선택한 그 땅, 즉 요단지역 지역 소알까지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엔 롯이 더 좋은 땅을 차지한 것 같다. 아브람으로서는 손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본문엔 그 땅이 이미 멸망을 예고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라고 말이다.

롯이 이미 요단 지역의 좋은 땅을 차지하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헤브론을 허락하셨다. 고대문헌에 따르면 그 당시 헤브론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브람은 장막을 헤브론으로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이후, 아브람과 롯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토라는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 롯이 눈으로 보기에 좋은 땅을 차지한 반면,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음을. 14장이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롯이 살고 있던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9왕들이 서로 이해관계에 얽혀 네 왕과 다섯 왕이 서로 편을 갈라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여 싸웠다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이 패배하여 달아났다는 것이요, 덕분에 소돔에서 살던 롯도 사로잡히고 그 재물까지 노략 당했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쳐부수고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조카 롯과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 왔다.

롯과 아브람이 헤어질 때 상황만으로 보면 롯이 승승장구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답은 한 가지다. 바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축복하셨느냐는 것이다. 이는 13:9절에서 아브람이 롯에게 했던 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여기서 ‘떠나가라’는 말은 ‘힢파레드’라고 한다. 뜻은 ‘헤어지다’는 것이다. 사실 롯은 선택권을 삼촌인 아브람에게 양보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욕심 때문이었다.

아브람과 롯의 차이가 이것이다. 아브람이 아비의 집을 떠난 것이 오직 하나님 때문이었다면 롯의 떠남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7절 이하에는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롯을 구했다. 이는 소돔 왕과 동맹을 맺었던 다섯 왕들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아브람 단독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그의 세력이 그들 이상으로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돌아올 때 소돔 왕이 그를 사웨 골짜기까지 나와 영접했다는 것은 그의 위상을 단적으로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축복했다는 것이다.

▶ 멜기세덱의 축복

 

멜기세덱의 존재는 뭘까? 게다가 14:18-19절에는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는 말과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그 멜기세덱이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아브람을 축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브람이 자신의 얻은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단지 십일조의 대한 기원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멜기세덱이 가져온 떡과 포도주는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게다가 아브람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준 것은 자신을 축복한 것에 대한, 즉 자신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롯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감사하는 표현이다.

그럼 이후, 아브람의 축복은 어떻게 되었을까? 15장에는 그의 축복은 순조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축복의 대명사다. 그런 그가 자식이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아브람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토를 달았다. 자신은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토라에서 말하는 축복과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은 다르다. 토라의 축복은 15:1절에 있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구절 가운데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니라’를 히브리어로 ‘마겐 라크 세카레카’다. 앞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이냐? 바로 ‘레크 레카’다. 뜻은 ‘너는 가라’, 혹은 ‘너를 위하여 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라크 레카’, 즉 ‘방패와 상급’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축복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었던 셈이다. 아브람 역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번 거역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몸에서 날 자가 그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 했다. 또 있다. 그는 아내의 여종 하갈에게서 그의 나이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 이후로도 시간은 꽤 흘렀다. 17장에는 아브람이 99세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이 흐르는 동안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축복의 상징인 후사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법하다.

이대로라도 아브람은 불평이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이 사래의 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혈통을 지닌 까닭이다. 게다가 자신의 나이는 출산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굳이 다른 자식을 기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람이 잊을 만하니까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이름을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이라고 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뜻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사래 역시 이름을 ‘사라’라고 하라는 것이다. 뜻은 ‘민족의 어머니’다. 히브리인에게 이름은 아주 중요하다. 그 사람의 운명을 말하는 것인 까닭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후손이 번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자꾸 뒤틀어져 그런지 몰라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맺자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식을 줄 테니 그 역시 뭔가를 하나님께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게 뭘까? 바로 할례다. 그의 집에서 사는 모든 남자는 이방인도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이번에는 틀림없다는 듯이 아브라함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는 것이다. 사라가 자신의 나이가 90세이니 어찌 아기를 낳을 수 있겠나고 웃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라고 한 것은 그를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할례가 무엇이냐? 표피를 베는 것이다. 할례란 단지 위생학적인 부분에서만 해석할 것이 아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고통이요, 다른 하나는 후손의 하나님의 언약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번 토라의 포션은 ‘레크 레카’다. 즉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가 보여줄 땅을 바라보고 나갈 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축복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자신의 형편과 사정이 아닌 오직 그의 말씀을 따를 수 있음이 축복인 것이다. 현실은 어렵고 답답하다. 하지만 오늘 토라가 나에게 하신 말씀임을 믿고, 그 현실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나갈 때 빛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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