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거룩과 규례, 토라포션 아흐레이모트2탄/ 레16: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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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4-30 18:39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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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에 땅이 굳더라!
▶ 안식일 중의 안식일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제사법은 물론이요, 이스라엘이 거룩을 유지해야 하는 것 역시 이전에 비해 강화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이 있다. 29절에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30절에는 “이 날에~~ 정결하리라”, 그리고 31절엔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요약하면 규례와 그 규례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비로소 정결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날로 여긴다. 그러나 지난 유월절 메시지에서 유월절은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안식일은 우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날이다. 그것만이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 죄를 속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의 복음은 쓸모없는 것 아니냐! 할 법 하다. 하지만 아니다. 31절 끝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영원히 지킬 규례라”는 말씀, 즉 토라 때문이다.
최근 토라라는 용어와 그에 따른 의미에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토라 회복이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복음을 훼손할 것인지 아닌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주, 서*원 교수는 자신의 강의에서 토라 회복을 ‘율법주의 회귀(回歸)니’ 하더라.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토라 회복은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이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실 그날을 위한 성도의 자세다. 토라를 지키는 것이 복음을 훼손하거나 죄의 해방 즉, 자유를 버리는 것이란 말은 지나친 비약이다.
예수님은 인간이시며, 하나님이시다. 그가 죽으신 것은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그 연약한 죄를 이기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가 죽으시기 전, 사마리아에서 최후의 만찬을 보내시려고 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것에 화가 잔뜩 난 야고보와 요한이 천사를 보내 그를 죽이자는 말에도 예수님은 거부하셨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능력을 왜 사용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의 능력을 말이다. 또한 그의 복음은 그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전부 구약의 토라였다. 모세오경, 혹은 선지서였다.
안식일은 이미 주일로 대체되었다 - 이걸 신학적으로 규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그게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의미 역시 달라졌다. 그날은 우리를 위한 날이다. 결코 여호와를 위한 날이 아니다. 토라는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것이 그들 멋대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죽고 난 이후, 제사의 거룩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다운 제사를 드린 그 날은 ‘죽음 후’라는 ‘아흐레이 모트’였고, 그 날이야말로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주일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 날이 어떤 날이든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날이며, 그가 정하신 방법대로 우리가 거룩한 모습이 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형식에만 머물러 하나님을 전정으로 예배하는 모습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토라의 회복, 복음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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